1. 2부 줄거리
‘탈무드’, ‘유대인 교육’ 등의 열풍이 우리나라에 분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면 랍비와 탈무드라는 단어도 연상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 주에 유대인 출신이 많다는 것은 분명 본받을 만합니다. 유대인들의 나라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건국된 채 70년도 되지 않는 신생 나라이지만 유대인의 역사는 4000년 세월을 거슬러 갑니다. 4000년을 이어온 유대인 역사는 끔찍하다 할 만큼 핍박받고 억압받으며 버텨온 파란만장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그렇게 핍박받던 그들은 어느새 막강한 힘을 지니고 세계 권력의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특히 언론계에서 유대인들은 막대한 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뉴욕 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 통신사 AP 등의 지분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산업에도 그들의 영향력은 거대합니다. 미국 할리우드 7대 영화사인 파라마운트, 워너브라더스, 20세기 폭스, 등의 영화사 중 6개를 유대계가 만들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다른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유대인이란 민족의 공동체가 아니라 종교에 정체성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국가 설립과 동시에 중동 지역에 끝없는 갈등과 폭력의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희생자였던 그들은 학살자가 되어 수많은 죄 없는 어린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불과 삼사십 년 전만 해도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던 유대인들이 반대의 입장이 되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얼마 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으로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테러리즘 섬멸’이라는 구호 아래 병원, 발전소, 학교 등의 민간인들이 있는 장소에 무차별 공습이 자행되어 대다수의 민간인이 아직도 희생되고 있습니다. 민간인 살상을 금지한 국제법을 위반해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미국의 묵인 아래, 자신들만의 성전, 아니 학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유대인 하면 나치에 의한 핍박, 아우슈비츠나 홀로코스트를 연상하게 하고, 그들에 대한 가슴 찡한 영화가 떠오르는 것도 이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 학살을 당한 유대인들도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행하고 있는 또 다른 학살이 잊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강대국이란 이름 아래, 그들이 행한 추악함은 가려지는 일이 잦습니다. 하지만, 지구촌 시대인 만큼, 국경을 넘어 서로를 보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교적 약소국인 팔레스타인인들이 겪은 고통도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만큼 알려졌으면 합니다.
2. 총평
자극적인 소재를 자극적이지 않게 표현하던 이 영화는 마지막에는 학살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흑백사진으로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나 이슬람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미국에서 오신 내 숙모에게는 레바논에서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숙모가 말씀하시길, 그 친구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어제 내 옆집에 살던 사람이 공습으로 죽었어”라고 얘기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미 민간인들을 향한 잔인한 공습이 어느새 일상이 돼버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전쟁만큼 잔인한 것이 또 있을까? 그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동족을 죽고 죽이는 전생이라는 것은 사람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 것 같다. 짐승들도 자신들이 살기 위해 먹이로써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는데 사람들은 조금 더 많은 영화를 누리기 위해 약자들을 학살하고, 그것을 성전인 양 포장합니다. 승자와 패자 상관없이 전쟁으로 인해 무고하게 죽은 많은 일반 시민들과 그 가족들의 슬픔은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이 글을 적는 동안에도, 밥을 먹는 동안에도, 지루함에 몸서리칠 때도 나와 다른 곳에 사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는 끼니 걱정하며, 공습으로 돌아가신 부모님과 동생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 부조리가 무서웠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나는 이전에도 내가 입맛이 없어 밥을 남길 때 지구 건너편의 누군가는 밥을 굶고, 그것은 내 주위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겪지 않아서인지, 나는 들을 당시에만 슬퍼하고 분노했고, 얼마나 지나자 다시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습니다. 이 영화는 그런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감독이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내 생각에 역설적인 표현으로 관객들에게 인간의 추악함에 대해 더 정확히 전달하려 한 것 같습니다. 왈츠란 4분의 3박자의 경쾌한 춤곡으로 남녀가 한 쌍이 되어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을 말합니다. 흔히 저녁에 열리는 파티의 춤으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거나 결혼을 축하할 때 등 왈츠는 인생의 행복한 순간들과 함께하는 춤입니다. 반대로 바시르와 관련된 레바논 전쟁은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지, 짐승보다 못한지를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감독은 아마 이 두 개의 모순된 단어로 이루어진 역설적인 영화제목으로 관객들에게 인간의 추악한 본성과 무관심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악마의 왈츠가 울려 퍼지던 지옥 같던 그 학살 현장을 아마 나는 직접 겪고 싶진 않지만, 이 영화로 인해 나와 다른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들과 관련된 뉴스를 접하고, 직접적인 도움은 아니더라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또, 이 사건 말고도 인간이 행해온 다른 학살이나 잔인함이 담긴 사건들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또, 어제의 희생자가 오늘의 학살자가 되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더 깊게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은 하루하루 평화로움에 익숙해져 평화라는 것의 고마움을 잊어가던 나에게 매일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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